퇴직 날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물어 봅니다.
“아쉽지 않아요?”
“섭섭하겠어요?”
마지막 날 회사 문을 닫고 나올 때는 잠시 슬프고 쓸쓸할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 아쉽거나 섭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더 큽니다.
잘 나지 않은 사람을 30년간 품어준 회사가 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퇴직 예정자라면 누구나 받게 되는 이 질문에는 두 시점이 맞대고 있습니다.
먼저 지금 직장에서 더 근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것이고, 두 번째는 앞으로 직장을 구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는 사건이며 감정입니다.
더 오래 다니고 싶다는 바람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일 뿐이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일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일입니다.
따라서 두 감정이 뒤섞이면 혼란스러울 뿐, 상황 개선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처음에는 퇴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고, 허방을 걷는 것처럼 불안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침식작용 때문인지, 지금은 고마운 마음이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렇게 변하기까지 수월한 것만은 아닙니다.
자꾸 되묻고, 내가 직면한 상황을 수용하고 긍정하려 노력했으니까요.
그리고 퇴직하기 전에 가을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은 축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을이라는 특별한 계절은 퇴직이라는 특별한 감정과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찾아간 인천 장수동의 800살 된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잎은 절경이었습니다.
그들은 말간 햇살에 반짝이고, 부드러운 바람에도 이파리가 후두둑 떨어집니다.
제 몸의 분신을 성큼 내놓는 은행나무와 어미 품을 벗어난 낙엽은 아무런 말 없이 고요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동안 동료들끼리 어울려 빛날 수 있었고, 그들과 부딪히면서 둥글어졌습니다.
그리고 단풍잎처럼 저도 회사에서 말없이 떨어져 나올 때가 된 것입니다.
내 차례가 온 것이고, 내 시간이 다한 것입니다.
출근 때마다 저를 마중하는 버즘나무도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버즘나무 단풍잎은 햇살에 반응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진녹색부터 갈색 사이에 숨어있는 수만가지의 색깔로 빛납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뿜어내는 버즘나무 단풍잎이 말합니다.
‘너도 나처럼 충분히 살았니?’
돌아보면 회사에서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저는 충분히는 아니지만 잘 살았습니다.
이제 제게 주어진 시간을 다 썼다는 느낌이 선명합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퇴직 후의 제 몫으로 풀어가면 되겠지요.
나무처럼 말하는 사람도 책에서 만났습니다.
“너도 이제 예순이구나.
하지만 어릴 때 보았던 60대 할머니가 네 자신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들지?”
하이케 팔러의 책을 읽으며 ‘예순 살’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누나, 장모님, 친구 아버지, 외할아버지, 동아리 선배, 당숙부, 고등학교 선생님...
그들처럼 저도 예순에 이르렀고, 다시 그들이 떠난 곳을 향해 걸어가겠지요.
생각해 보니 나이 먹는 일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퇴직도 그렇고요.
제가 좋아했던, 저를 사랑했던 이들을 따라가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기분까지 좋아집니다.
퇴직하고 나면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산 단풍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새 눈이 움터 있고, 겨울이 다하면 다시 그 자리에서 새순이 돋아나겠지요.
*인용한 책 : 하이케 팔러 글. 빌레리오 비달리 그림. 김서정 옮김. "100 인생 그림책". 사계절
"평범한 일상을 덖어 환희를 짓고 싶은" 함께성장인문학연구원 칼럼니스트 김황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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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50일을 앞두고
충분히 산 단풍처럼, 나도 아름답게 떠나야 할 때
작성
2025.11.24 11:33
수정
2025.11.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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