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인성찬 씨)
공판장으로만 내보내면 포도가 닿는 지역은 한정되기 마련인데, 전국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는 길을 아들이 열었다.
■ 직거래가 바꾼 것
성찬 씨는 귀농 전부터 농장의 온라인 판매를 맡아 왔다. 공판장으로만 출하하면 포도가 일부 지역으로만 나가 전국 소비자가 맛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거래를 하면 오늘 수확한 포도를 오늘 보내 다음 날 받아볼 수 있고, 리뷰를 통해 소비자 반응도 직접 들을 수 있다.
처음 20~30상자로 시작한 판매는 한 번 맛본 고객들이 다시 찾으면서 해마다 늘었고, 이날 하루에만 120건이 넘는 주문이 들어왔다.
주문 목록에 오른 충랑 140상자와 캠벨 38상자는 주문자별로 꼼꼼하게 따로 포장돼 전국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수익이 많이 좋아졌다”며 아들의 제안을 고마워했다.
■ 어떤 포도를 보내나
충랑 포도는 씨가 없고 당도가 18~22브릭스에 이를 만큼 달아, 일반 캠벨 포도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인다. 성찬 씨는 “전국적으로 시도한 농가는 많았지만 지금 재배해서 유통까지 하는 곳은 서너 농가 정도”라며 “그만큼 귀한 포도”라고 설명했다.
씨가 없어 먹기 편하다 보니 “아이들이 먹기 좋다”는 소비자 반응이 가장 많다고 한다.
재배가 까다롭기로 알려진 충랑이 이곳에서 잘 자라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남원에서도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아영면은 해발고도가 높은 고랭지여서, 낮에는 덥고 한여름 밤에도 바람이 불어 일교차가 크다.
■ 밭에서의 하루
포도는 한여름 태양을 머금어야 제맛이 든다. 아버지는 갓 딴 캠벨 포도를 맛보고 “당도가 어마어마하다”며 17브릭스 가까이 나오겠다고 흐뭇해했다. 사흘간 비 소식이 있던 날, 부자는 포도알이 터지기 전에 서둘러 수확에 나섰다.
40도 가까운 더위 속 작업은 젊은 그에게도 버겁다. 성찬 씨는 “몇 달 안 했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아버지가 오랜 세월 이 일을 해내신 게 대단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오니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긴다”며 묵묵히 아들의 성장을 지켜본다.
서울 총각이었던 그는 다섯 달 전 남원으로 내려왔다. 귀농 5개월 차 초보 농부 인성찬 씨는 지금 남원시 아영면 고랭지 포도밭에서 아버지와 함께 포도를 키우고 있다.
그는 “삭막한 도시의 경쟁에서 벗어난 게 가장 좋다”며 “가족과 대화도 늘었고, 직접 키운 작물이 계절마다 자라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포도밭의 하루와 내일
그가 가장 자신 있게 내놓는 포도는 국내에서 개발한 품종인 ‘충랑’이다.
성찬 씨는 “이런 환경이 포도를 익히고 알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다”며 “공판장에서도 고랭지 포도를 더 인정해 준다”고 말했다.
귀농 5개월 차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포도를 잘 아는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대학 시절 축구 선수로 뛰었고, 군대에서는 특전사로 복무했다. 제대 후 서울에서 회사 생활과 요식업을 거치며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던 그를 이끈 건 아버지였다.
20년 전 먼저 귀농한 아버지를 도우러 남원을 오가던 그는 고령화된 농촌을 보며 “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생각보다 많다”고 느꼈고, 결국 농부의 길을 택했다.
유기농 재배법을 연구하며 포도 농가 강사로 활동하는 큰아버지도 든든한 스승이다. 큰아버지는 “아버지 뒤를 이어 장인 정신으로 배우려는 의지가 강해 흐뭇하다”고 말했다. 햇빛을 직접 받아야 붉게 물드는 ‘홍주’ 품종에는 종이봉지 대신 망사를 씌운다는 것도 큰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알이 조금 비어 상품성이 떨어지는 포도도 버리지 않고, 당도는 다른 포도와 똑같이 높은 만큼 따로 골라 즙으로 가공한다. 직접 가공 공장을 찾아 착즙 과정과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묻고, 한 번에 파우치가 몇 개나 나오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성찬 씨는 충랑 포도즙을 시작으로 와인 등 다양한 가공품까지 고민하며 농업의 6차 산업화를 내다보고 있다.
무뚝뚝한 부자 사이지만 정은 깊다. 비가 내려 농사를 하루 쉬던 날, 성찬 씨는 20년 넘게 농사에만 매달려 온 아버지를 모시고 남원 시내 미디어아트 전시관을 찾았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라 참 행복했다”며 이런 날이 계속되길 바랐다.
그의 시선은 이미 내년을 향한다. 올해 4월 신품종 ‘메가블랙’을 심어 일주일에 서너 번씩 순을 정리하며 정성껏 키우고 있다. 인기 품종을 좇기보다 자신만의 브랜드 포도를 만들고 싶어서다.
성찬 씨는 “우리 지역 포도의 우수성을 더 많은 곳에 알리고 싶다”며 “아영면에는 고랭지 덕분에 상추, 감자 같은 좋은 작물도 많은 만큼 우리 농민들이 직접 직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고랭지의 햇살과 바람, 아버지의 20년 경험, 그리고 청년의 열정이 한 송이에 담긴다. 남원 아영면 인성찬 씨의 포도가 더 많은 식탁에 오를 날을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