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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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강단에서 법을 가르치고 서울시의회 전문위원으로 15년간 예산 심사 현장을 지켜온 박동명 박사는 이번 예산안을 '재정민주주의의 시험대'로 규정한다. 그는 '서울특별시 시민참여예산위원장' 으로서 시민참여예산 현장에서 체득한 납세자의 눈높이로 국회가 지켜야 할 헌법적 책무를 짚는다.
국회가 821조 원이라는 유례없는 규모의 차기년도 정부 예산안 심사에 돌입하였다. 전년 대비 12.8%, 무려 93조 원이 늘어난 초팽창 예산이다. 경제성장률이 3%대 중반에서 4%까지 거론되는 회복 국면에서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하는 확장재정(expansionary fiscal policy)이 자칫 물가를 다시 자극하고 재정 건전성(fiscal soundness)을 훼손하지 않을지 우려가 앞선다.
헌법 제54조가 국회에 예산의 심의·확정권을 부여한 데에는 깊은 뜻이 있다. 행정부는 본래 예산을 늘리려는 속성을 지닌다. 그 팽창의 본능을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통제하고, 세금을 내는 국민의 권익을 지키라는 것이 헌법의 명령이다. 예산은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국민의 삶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백지수표가 된 162조 원 기금
법학적 관점에서 가장 엄중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대목은 초과 세수를 재원으로 조성되는 162조 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이다. 국가재정법이 천명하는 예산총계주의(principle of comprehensive budgeting) 원칙은 국가의 모든 수입과 지출을 하나의 예산 체계 안에 담아 국회의 직접 통제를 받도록 한다. 기금은 특정한 공익 목적을 위해 예외적으로 탄력적 운용이 필요할 때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보완 장치일 뿐이다.
그런데 이번 기금은 청년, 신성장동력, 균형발전, 교육·인재 육성 등 사실상 국정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기금 설치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목적의 구체성과 한정성'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포괄적 백지위임에 가까운 지출 재량은 국회의 사전 심의권을 무력화하고, 결산을 통한 사후 통제마저 느슨하게 만들 위험이 크다.
더욱이 일시적인 반도체 업황 호조로 늘어난 세수를 기금이라는 거대한 저수지에 모아두고 정부가 쌈짓돈처럼 꺼내 쓴다면, 이는 재정 법치주의(fiscal rule of law)의 중대한 후퇴이자 선심성 재정 포퓰리즘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기금 운용의 법적 구속력을 강화하고 지출 항목을 구체적으로 법률에 명시하는 법정화(法定化), 곧 엄격한 입법적 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골목길 수천만 원도 '송곳 심사'를 거친다
서울특별시 시민참여예산위원장으로서 현장에서 마주한 시민들의 눈높이는 엄정하다. 수천만 원 규모의 골목길 보행로 정비나 취약계층 돌봄 사업 하나를 편성할 때도 수많은 시민이 참여해 타당성을 따지고, 중복 투자는 없는지 매서운 '송곳 심사'를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늘 배운다. 시민들은 세금 1원이 이웃의 땀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공적 자산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풀뿌리 현장에서는 이토록 엄밀한 재정민주주의의 원칙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런데 정작 수백조 원을 다루는 중앙정부와 국회가 '세수 풍년'이라는 착시에 기대어 씀씀이를 손쉽게 키운다면, 이는 납세자 주권에 대한 배신이다. 기금이라는 이름표 아래 공공기관의 성과급 잔치나 고위 공직자 편의를 위한 비본질적 지출로 혈세가 새어나가는 일은 시민의 상식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재정의 존재 이유는 관료 조직의 안락함이 아니라 가장 절박한 민생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있다.
12월 2일, 주권자와의 약속을 지켜라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종합정책질의를 앞두고 여야의 대치가 가팔라지고 있다. 여당의 맹목적인 증액 드라이브도, 야당의 정쟁형 삭감 공세도 국민을 중심에 두지 않은 정치 공학일 뿐이다. 국회는 헌법이 부여한 예산 심의권의 무게를 깊이 새기고, 모든 사업의 예비타당성(preliminary feasibility)과 법적 근거를 현미경처럼 검증해 불요불급한 거품을 정밀하게 걷어내야 한다.
헌법 제54조 제2항은 국회가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 곧 12월 2일까지 예산안을 의결하도록 명령한다. 이 법정 처리 시한은 주권자와 맺은 엄숙한 약속이다. 타협 없는 정쟁으로 시한을 넘기는 구태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821조 원의 예산안이 권력의 전시성 잔칫상이 될 것인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지키는 진정한 '재정 방파제'가 될 것인지는 오직 국회에 달려 있다. 헌법이 맡긴 심의권을 얼마나 성실히 행사하는지, 그리고 시민의 눈높이를 얼마나 끝까지 놓지 않는지가 그 답을 결정할 것이다. 예산을 바르게 세우는 일은 결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법학박사, 선진사회정책연구원 원장
▷서울특별시 시민참여예산위원회 위원장
▷전국주민참여예산광역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저서> 주민참여예산의 이해와 운영 전략 (2026년), 여성과 법률 등 다수


